36 동래정씨 의 나라 장산국또는 거칠산국 왕이름 복원 프로젝트 太祖 금진왕 :: 뿌리를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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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鄭煐勳       본관 :       작성일 : 2005년 02월 01일(화) 18:23
  • 제 목 : 동래정씨 의 나라 장산국또는 거칠산국 왕이름 복원 프로젝트 太祖 금진왕
  • 東萊鄭氏(동래정씨)
    始祖:거칠산국태조(금진왕) (長山國)
    본관:부산 동래 (경상도)
    집성촌: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동래정씨 거칠산국왕 이름 복원프로젝트
    太祖:금진왕

    사루王 (2世祖) 1cc~30cc

    진성王 (3世祖) 31cc~50cc

    마루王 (4世祖)51cc~63cc

    진위王 (5世祖)64cc~71cc

    도진王 (6世祖)82cc~91cc

    종위王 (7世祖)92cc~123cc

    관친王 (8世祖)124cc~127cc

    자가王 (9世祖)128cc~137cc

    죽신군페위王 (10世祖)138cc~139cc

    장선王 (11世祖)140cc~156cc

    정회문(鄭繪文):12세손

    정지원(鄭之遠):13세손

    정문도(鄭文道):14세손

    거칠산국(長山國)은 156년에 신라의 병합으로 멸망함.



    거칠산국이 있었다는 증거
    글제목 : 長山國 건국설화
    長山國 건국설화


    아득한 옛날부터 고씨들이 장산기슭에 있는 장자벌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
    다. 고선욱(高仙玉)은 홀어머니와 함께 토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소나
    기비가 그치자 먼하늘에서 선인이 영롱한 칠색무지개를 타고 하늘에서 이곳 마을에
    하강하였다. 선인은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분향기에 이끌려 고선옥의 토막집을 찾았
    다. 선인은 고선옥에게 냉수를 청하자 물그릇에 냉수를 청하여 물그릇에 물을 떠서
    주면서 얼굴을 돌려 외면하였다. 선인은 물그릇을 거울삼아 외면한 처녀의 얼굴에
    비춰 보았다. 선인은 선녀보다 아름답고 옥처럼 빛나는 고선옥의 모습에 매혹되었
    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잔치를 베풀었다. 세월이 흐럴 이들 사
    이에는 아딜 열명과 딸 열명이 출생하여 장성하여서는 모두 20곳 마을에 흩어져 살
    았다. 제마다 안씨 정씨 박씨 이씨 김씨 최씨로 창성하여 그 마을을 다스렸다.

    선인은 마을에 토성을 쌓아 그 씨족들을 다스리는 대족장이 되었다. 선인은 회혼
    때(결혼 60년)가 되자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등천하였다. 그때부터 고선옥
    은 고씨족을 다스리는 고씨할매가 되었다. 고씨할매는 날마다 아들 딸을 순산하였
    던 제왕반에 제단을 차려 놓고 옥황상제께 선인의 하강을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외
    거리 절에 가서 불공도 드렸다. 또 산정에 있는 큰 뷔위(영감 할매 바위)에 올라가
    서 하늘을 바라보며 선인의 하강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고씨할매는 그 바위 밑
    에서 선인을 기다리다 지쳐서 돌아가셨다. 20곳 마을에 살던 아들 딸들은 고씨할매
    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 씨족들을 이끌고 와서 바위를 다듬어 상여를
    만들고(상여바위)정상에 큰 묘를 만들어 안장하였다.

    지금도 그 제왕반 바위, 상여바위, 영감할매 바위가 있고 그 묘가 있다. 그때부
    터 마을 사람들은 고씨할매의 넋을 고을의 질병을 막아 주고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모시고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 마을의 후손들은 마
    을 뒷산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정월 보름날에 고당 할머니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 제사는 마을에서 가장 깨끗하고 신망있는 부부를 택해서 제관으로 선택하고 제관
    은 궂은 일을 보지 않고 당일에는 찬물에 목욕을 하고 제수물은 흥정하지 말고 값대
    로 치러 마련토록 하였다.

    제관은 마을에 살고 있는 각 성씨 이름을 봉송하면서 동태민안을 기원하고 재앙
    과 질병이 없도록 시주종이를 불살라 비는 풍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 마을
    사람들은 들에서 식사를 할 때는 반드시 첫숟가락에 밥을 떠서 "고시례"(高氏禮)라
    고 고씨할매에게 예를 올렸다. 그래야만 식후에 탈이 없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아
    들이 없는 부인이 제왕반에 가서 촛불켜고 기도한 후 외가리절에 가서 공을 드리면
    옥동자를 낳고, 영감할매 바위에 가서 공을 드리면 부부의 정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서 선인이 무지개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은 장산 넘어 먼 하늘
    가에서 무술과 지혜가 뛰어난 남자가 왔다는 것을 신격화 하였고 고씨 할매와 그
    딸 고선옥은 원시 사회의 제사를 맡은 제관할매와 신딸로서 큰딸(크슬아기=구술아
    기)의 뜻을 전하고 제왕바위는 신당의 뜻이고, 10남 10녀가 이웃 마을에 흩어져 살
    았다는 것은 그 선인은 대추장(큰촌장)이 되어 그 씨족들로 하여금 20개 마을을 다
    스리게하여 씨족공동사회를 형성하였다는 뜻이고 외가리 절은 그당시 이미 금관가야
    국과 친교하여 불교가 전파되어 있었다는 뜻이고, 상여바위와 고씨묘는 왕비의 석곽
    묘를 뜻하고 영감할매 바위는 선인과 고선옥을 수호신으로 숭배하였다는 뜻이고, 고
    씨례는 고수례의 풍습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전설은 장산국(長山國)의 건국신화로 생각된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동래

    동쪽 십리지점에 장산국의 옛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장산기슭에 있는 재
    송동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장산국이라는 작은 나라 이름은 이곳에 있는 장산이라
    는 산 이름과 같고 이산을 상살미, 자류미라는 속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속명은
    큰산, 높은산, 동쪽산의 뜻의 옛말로 해석된다.

    장산국은 동국여지승람 동래현조에서 "옛장산국은 일명 내산국(來山國)으로, 대군
    을 일으켰는데, 삼십명으로 가야국을 쳤다. 그리고 신라는 이를 쳐서 거칠산군(居柒
    山國)을 두었다."라고 적혀 있고, 동국사를 살펴보면 신라 4대 탈해왕 23년에 이웃
    국경에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있어 신라왕은 이 두나라가 걱정이 되어 거도장군을
    변관으로 삼아 항상 장토야(기장)에서 말을 모아 달리게 하여 말타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하여 두나라가 여기에 대비가 없도록 해놓고 거도장군이 습격하여
    거칠산국을 멸망시켰다. 거칠산국은 아마 장산군의 일명 일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장산국(래산국)은 거칠산국(居柒山國)의 일명으로 보고 있고 거칠산국이라는 나
    라 이름은 망미동에 있는 황령산의 옛이름은 거칠뫼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거칠산국
    삼국사기 거도전에는 기원후 1세기께 탈해 이사금을 섬기는 거도 가 군사와 마필을 동원해 거칠산국(지금의 부산으로 추정)을 쳐서 없애버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일찍부터 부산이 신라의 영역에 편입됐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가 야의 전성기인 4세기에도 부산은 금관가야와 강한 결속력을 갖고 있었다고 반박한다.
    삼한·삼국시대 부산은 신라와 가야 중 어느 쪽이었을까.
    21일부터 12월 5일까지 복천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금관 가야와 신라 특별전'은 부산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작업이다.
    선 뜻 믿기 어려운 문헌자료 대신 유물을 놓고 이야기 하자는 것. 가 야는 김해박물관,신라는 경주박물관에서 따로 전시됐을 뿐 한 자 리에 놓고 비교 전시하는 작업이 없었다는 점도 특별전을 연 계기 중 하나. 경주 사라리 출토 칠초동검 등 11개 기관에서 대여한 350여점의 유물이 전시된다.
    이를 통해 경주·울산의 동남해안권과 김해·부 산의 남동해안권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금속기,외래유물과 무덤양 식 등 지역 차이를 비교하고 문화적 동질성과 차이점을 추출해 낸 다.
    특별전에서 한 눈에 확연히 가야와 신라의 차이를 볼 수 있는 유 물은 4세기대 화로형토기. 가야에서는 원형의 손잡이가 달리고,안 에 항아리를 놓는 기대로 사용됐다.
    반면 경주·울산에서 출토된 신라 화로형토기는 아가리가 밖으로 심하게 벌어지고,손잡이도 없 다.
    주거지나 패총에서 발견되는 생활토기도 서로 다르다.
    부산· 김해지역에서는 붉은 색의 연질토기가 80%를 넘지만 경주 황성동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 중 90%가 와질토기인데서 알 수 있듯이 경주지역의 생활토기는 대부분 와질계통이다.
    무덤 양식은 문화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바로미터. 4세기대 김 해와 부산에서는 부장품을 부장하는 수납공간인 부곽과 주검을 매 장하는 주곽을 별도의 구덩이에 판 김해형 목곽묘가 대세. 반면 경주형 목곽묘는 하나의 구덩이에 칸막이를 둬 주곽과 부곽을 구 분했다.
    그럼 동래는 언제 신라에 편입됐을까.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동래 복천동은 4세기까지도 김해형 목곽묘와 외절구연고배(아가리가 밖으로 꺾인 고배),통형동기(창의 자루 끝에 꽂는 청동의기) 등이 공통적으로 출토돼,동일 문화권을 형성했다.
    신라 권역에서는 전 혀 보이지 않는 것들. 5세기 전반이 되면 복천동에도 오리모양토 기 등 경주 울산권의 특징적인 유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갑옷의 부장도 5세기 초 일시중지된다.
    이런 짧은 혼란기를 거친 뒤 부산 은 신라에 편입됐다.


    신라에서 책을 불태워 버렸다고 추측 한다. 정씨가 왕조란 것을 숨기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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