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전주류씨 연혁 :: 뿌리를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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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류기송       본관 : 전주류씨       작성일 : 2013년 02월 08일(금) 11:50
  • 제 목 : 전주류씨 연혁
  • 전주류씨 연원
    전주류씨는 다음과 같이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1. 류습(柳濕)파
    전술(前述)한“신라와 고려 시대의 전주류씨”, “류습(柳濕)파 족보와 문화류씨 족보의 변천” 및“류습(柳濕)파의 선계(先系) 논쟁(論爭)”을 비추어 볼 때 문화분관설이나 토성전주류씨설 모두 시조 습(濕)의 상계(上系) 계대(系代)를 이을 수 없다.
    그리고 전주류씨 종중의 승인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1925년에 발간한 류승추술(柳乘追述, 柳永熙)에서는 문화류씨의“종덕지”에서 양재(良梓) 이하에 기록한 설명내용을 삭제하고 문화류씨 10세 양재의 대(代)를 이어 11세를 방직(邦直), 12세를 운(橒), 13세를 혼(渾), 습(濕), 지(池) 3형제로 하고, 종덕지에 수록된 중국의 황제(黃帝)를 기원으로 하는 원파록을 그대로 수록하여 전주류씨를 문화류씨의 한 분파로 하였다.
    그러나 류승추술은 전주류씨 종중의 인정을 못 받아 수거하여 불태우라는 통문(通文)을 돌린 바 있는 서적(書籍)이며, 또한 최근에 문화류씨측에서는 “차원부설원기”를 부정하고 족보에서도 중국 황제부터 차씨, 류씨로 이어지는 원파록을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삭제하여 연안차씨와의 연계를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 선조님들께서는 문화류씨분관설이나 토성전주류씨설은 모두 확실하게 계대를 이을 수 있는 증빙자료 없이 변증(辨證)과 반증(反證) 등으로 논쟁(論爭)을 하였는데 이 내용만으로는 옳지 않다고 판단된다.
    고로 시조의 상계를 이을 수 있는 확실한 연구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시조 완산백 습(濕) 이상의 상계(上系)에 대한 추론이나 문화분관설 등을 향후 각파 종중에서 문헌이나 금석문 등에 사용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며, 습(濕)을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시조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의 생몰년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사위 대제학(大提學) 심효생(1349∼1398)이 고려 충정왕1(1349)년에 출생한 기록으로 보면 전주류씨는 약 7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으며, 시조로부터 4세까지의 세계도를 나타내면 표-3.7과 같다.
    선조10(1577)년 시조 및 시조비 묘갈문에 의하면“시조(始祖) 습(濕)은 슬하에 5남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극강(克剛), 둘째 아들 극서(克恕), 넷째 아들 극제(克濟) 및 사위 심효생(沈孝生)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셋째 아들 극수(克修)와 막내아들 극거(克渠)는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 때 세 아들이 문과(文科)에 급제를 하면 나라 법에 따라 부모에게 벼슬을 주게 되어있어 시조는 봉정대부 사헌부 장령(掌令)에, 시조비(始祖妣) 전주최씨는 국대부인(國大夫人)에 추증되었다.
    그 후 조선 초에 이르러 시조(始祖)의 따님인 심효생의 부인 류씨(柳氏)가 정경옹주(貞慶翁主)가 되었기 때문에 시조는 완산백(完山伯)에, 시조비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봉(追封)된 것으로 보인다.
    시조 류습(柳濕)의 아들 5형제 중 둘째인 극서(克恕)는 고려 말기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지제교(知製敎), 연안부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빈(濱)은 조선 초기에 영흥부사를 하였다. 빈(濱)의 아들 경손(敬孫)은 해주 판관을, 의손(義孫, 회헌공)은 세종 때 이조ㆍ예조참판을 하였고, 말손(末孫)은 순창 군수를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다.
    경손(敬孫)의 손자 숭조(崇祖)는 18년간 성균관에 재직하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말손의 셋째 아들로서 회헌공[의손]의 양아들이 된 계동(季潼)은 충무위 부사직을 역임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계동(季潼)의 큰아들 식(軾)은 인천도호부사를 지내고, 막내아들 곡(轂)은 전라도 고산현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여 고산현 율곡리에 있는 시조 묘에 5대봉사(奉祠)의 기틀을 마련하여 모시도록 하니 오늘날 많은 자손들의 조상숭배에 귀감이 되었으며, 식(軾)의 큰 아들 윤덕(潤德)은 중종 때 대사헌(大司憲), 예조 참판, 한성 우윤(右尹) 등을 지냈다.
    말손(末孫)의 손자 헌(軒)은 간신배의 방자함을 탄핵하는 상소(上訴)를 올리자 화가 난 연산군이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사간원을 없애버리니 연산군(燕山君) 시대의 마지막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헌(軒)의 아들 세린(世麟)은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을 이끌고 조광조를 구제하는 상소(上疏)를 하였으며, 증손 영길(永吉)은 예조참판에 이르렀고 그의 아우 영경(永慶)은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워 전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이 되어 부친 의(儀)도 전릉부원군이 되었다.
    한편 묵계공 복립(復立)은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치 않았는데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던 외숙 경상 우감사 김성일(金誠一)을 따라가 참모 역할과 함께 수문장(守門將)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는데 진주성이 왜적(倭敵)에게 함락되어 순절(殉節)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운 조생(肇生)은 호성공신으로서 부친, 아들, 손자 4대가 봉군(封君)의 교지(敎旨)를 받았다.
    인조 때 전창군(全昌君)에 봉해진 영의정 영경(永慶)의 손자 정량(廷亮)은 사은사(謝恩使), 진향사(進香使)로 청나라에 3번 다녀왔고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으며, 전창군의 부친 열(悅)은 전원군에, 송설체(松雪體) 글씨에 능한 전원군 아들 심(淰)은 참판으로서 전평군에 봉해져 5대가 봉군(封君)이 되었다.
    영성(永成)의 셋째 아들 질(秩)은 인조1(1623)년에 알성급제(謁聖及第 )하여 병자호란 때 철원부사로서 청병에 맞서다 전사(戰死)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오른 경창(慶昌)은 사마시,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 대사간에 이르렀다.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내고 제자백가와 천문에 정통한 정원(正源)은 병률(兵律)과 도학(道學)에 능통하여 삼산문집(三山文集)과 하락지요(河洛指要)를 지었고 영순(永詢)은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안동의 기봉공[복기]과 함께 실전(失傳)된 직제학공[극서] 묘소를 찾아 묘비를 세웠다. 영변부사를 지낸 정양(鼎養)은 문장이 뛰어나 고양시와 용인시에 있는 묵계공 비문을 비롯하여 여러 문중 선조(先祖)의 비문을 지었다.
    정조 때 춘관지(春官志) 등을 편찬한 의양(義養)은 승지(承旨)가 되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편집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고 홍주목사로 선정(善政)을 베푼 의(誼)는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완(玩)은 무과(武科)로 참령(參領)을 하였고, 정(珽)은 문과로 교리(校理)를 지냈다. 언론인이며,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인 근(瑾)은 구한말(舊韓末)에 탁지부(度支部, 재무부) 주사(主事)를 하고 장지연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5대 황성신문사장이 되었다.
    또한 대종교와 광문회(光文會)사업에 종사하였고, 휘문의숙장[교장], 중앙학교장을 하였으며, 3ㆍ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는 양기탁과 함께 고문이 되었고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다.
    독립운동가인 임(林)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인식(寅植)은 민족운동가ㆍ교육자로 활약하였고, 영(瑛)은 해방 후 대법관을 지냈으며, 기수(驥秀)는 용인군 제2대 국회의원을 하였고 그의 손자 기홍(基洪)도 제17, 1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편 치송(致松)은 제6, 9, 10, 11, 12대 국회의원을 하고 민주한국당 총재를 지내었고 아들 일호(一鎬)도 18, 1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또한 문목공후 성걸은 기획재정부 차관을 거쳐 1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청(靑)은 전주고등학교장을 거쳐 제4, 5, 6, 8대 국회의원을 하고 전주류씨 문중에서 운영하는 “유일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기정(琦諪)은 제8, 9대 국회의원, 중소기업협동조합회장을 하였다.
    전주류씨는 1360년경에 관향(貫鄕)인 전주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대를 거듭할수록 크게 번성하여 점차 인근으로 세거지(世居地)를 확대해 나가 그중 일부는 관직을 따라 서울과 파주, 의정부, 광주, 이천, 용인 등 경기지역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한편 영의정 영경(永慶)이 광해정변(光海政變)에 휘말려 일족이 화가 미치자 장단, 평창, 음성, 임실, 진주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강원감사를 지낸 계반(季潘)의 일부 자손들이 임진강변과 황해도, 강원도 내에 널리 퍼져 살게 되었다.
    한편 벼슬한 수(數)는 문과(文科) 97명, 음직(蔭職) 197명, 무과(武科) 79명, 사마시(司馬試) 103명, 영의정 1명[9세 류영경], 판서(判書)는 3명[8세 류훈, 15세 류복명, 16세 류당], 참판(參判)은 16명, 관찰사(觀察使)는 9명이다.
    또한 대장(大將) 1명[8세 류훈], 봉군(封君) 9명[4대봉군 8세 류효찬, 9세 류조생, 10세 류파, 11세 류시성, 5대봉군 8세 류의, 9세 류영경, 10세 류열, 11세 류정량, 12세 류심], 부마 1명[11세 류정량], 시호(諡號) 받은 분은 4명[6세 류숭조, 11세 류정양, 15세 류복명, 16세 류당], 청백리는 2명[6세 류헌, 11세 류경창]이다.
    1932년 정래화(鄭來和)가 편찬한 전주생진청금록(全州生進靑襟錄)에 수록된 소과(小科)의 진사와 생원급제자는 전주인완산백습후(全州人完山伯濕后)로 되어 있다.
    1908년 조선 말에 조정에서 발간한 증보문헌비고정오(增補文獻備考正誤)편에 수록된 전주류씨 부분을 번역하여 수록하면 다음과 같다.
    ○시조(始祖) 류습(柳濕)[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류습의 아들 류극서(柳克恕)[벼슬이 직제학(直提學)이었다〕류극서의 아들 류빈(柳濱)〔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이었다〕류빈의 아들 류의손(柳義孫)[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제학(提學)이었는데,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류신손(柳信孫)[벼슬이 참판(參判)이었다] 류말손(柳末孫)[벼슬이 집의(執義)였다] 류빈의 증손 류숭조(柳崇祖)〔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이었다. 시호가 문목공(文穆公)이다〕
    류의손의 손자 류식(柳軾)〔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전한(典翰)이었다〕류식의 아들 류윤덕(柳潤德)〔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판이었다〕류윤덕의 손자 류복립(柳復立)〔벼슬이 주부(主簿)였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류식의 8세손 류관현(柳觀鉉)〔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의(參議)였다〕 류관현의 현손 류치명(柳致明)〔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판이었다〕 류말손의 손자 류헌(柳軒)〔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이었다. 청백리(淸白吏)로 뽑혔고, 향사에 배향되었다〕
    류헌의 손자 류감(柳堪)〔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사인(舍人)이었다〕 류감의 아우 류훈(柳塤)〔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어영 대장(御營大將)이었다〕류감의 아들 류영립(柳永立)〔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감사(監司)였다〕
    류영립의 아들 류색(柳穡)〔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판(參判)이었다〕 류색의 5세손 류태명(柳泰明)〔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승지(承旨)였다〕 류복명(柳復明)〔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서(判書)였다. 시호가 정간공(貞簡公)이다〕 류태명의 손자 류의양(柳義養)〔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판이었다〕
    류색의 6세손 류당(柳戇)〔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공조 판서(工曹判書)였다. 시호가 효간공(孝簡公)이다〕 류헌의 증손 류영길(柳永吉)〔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판이었다〕 류영길의 아우 류영경(柳永慶)〔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이었으며, 공신으로서 전양 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류영경의 손자 류정량(柳廷亮)〔선조조(宣祖朝)의 부마(駙馬)로서 전창군(全昌君)에 봉해졌다. 시호가 효정공(孝靖公)이다〕 류정량의 아들 류심(柳淰)〔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판이었으며, 전평군(全平君)에 봉해졌다〕류헌의 5세손 류경창(柳慶昌)〔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판이었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시조의 9세 류조생(柳肇生)〔무과 출신이며, 공신으로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다〕

    2. 류 혼(柳 渾)파
    류혼(柳渾)을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의 류삼룡(柳三龍)씨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한“류방헌묘지명(柳邦憲墓誌銘)”등을 연구하여 선계(先系)를 신라 때 각간(角干)을 지낸 류기휴(柳其休)를 비조(鼻祖)로 하고, 류혼(柳渾)을 시조(始祖)로 하는“전주류씨호은공파세보(全州柳氏壺隱公派世譜)”를 1993년에 발간한 바 있다. 며, 인구는 5,000명 정도이다.
    류혼파는 류기휴의 14세를 혼(渾)과 지(池) 두 분으로 하였는데 이는 류삼룡씨가 우리 대종중에 찾아와서 류기휴를 시조로 하는 족보를 만들자고 제의를 했으나 우리 대종중 측에서 거절을 하여 이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류삼룡씨는 2005년에“[羅麗時代 名聞世家] 全州柳氏實記”를 발간하였다. 여기에는 왕차류삼성세계(王車柳三姓世系) 즉 문화류씨 족보에 게재했던 중국의 황제를 연원으로 하는 원파록(源派錄)과 류방헌묘지명, [승]류창운묘지명, 류영재처조씨묘지명, 류광식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토성전주류씨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유익한 자료이다.
    한편 선조40(1607)년에 조종운(趙從耘)이 편집한 씨족원류(氏族源流)에 는 시조 류혼(柳渾)을 여조문하시중평장사(麗朝門下侍中平章事)로, 1923년에 채동열(蔡東說) 등이 편집한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 산록(散錄)편에는“柳壺隱渾全州人文首相麗亡守節自終諡忠肅”이라고 수록되어 있다.
    또한 한국근현대인물자료의 류백년(柳佰年) 편에는“平章事 完山府院君 柳渾 十八世孫, 吏參 柳世華 十三世孫, 進士 柳思諶 十一世孫, 孝行 柳德懋 孫”, 류병흡(柳炳翕) 편에는“平章事 完山府院君 柳渾 十七世孫, 吏參 柳世華 十二世孫, 進士 柳思諶 十世孫”이라고 수록되어 있다.
    또한 대과(大科)의 문과(文科) 급제자 및 1932년 정래화(鄭來和)가 편집한 전주생진청금록(全州生進靑襟錄)에 수록된 소과(小科)의 진사(進士)와 생원(生員) 급제자는 전주인문성군양재후(全州人文城君良梓后)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명단은 표-3.11과 같다. 이는 혼(渾)의 자손은 문화류씨 시조 대승공[류차달]의 후예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3. 류 지(柳 池)파
    류지는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전주최씨족보에 시조 최아의 사위로서 문과 전주인(文科全州人)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류익지(柳翼之)는 전주류씨인데 부친은 류인흡(柳仁洽), 조부는 류중연(柳仲淵), 증조부는 류지(柳池)이다. 이는 씨족원류에 수록된 계보인 표-3.13과 일치한다. 한국근현대인물자료의 류덕수(柳德洙) 편에는“佐命功臣 完城君 柳池 后, 翰林 柳翼之 后, 柳應澤 玄孫, 柳益煥 曾孫, 柳萬九 孫”, 류조경(柳照璟) 편에는“佐命功臣 完城君 柳池 后, 翰林 柳翼之 后, 柳興春 玄孫, 柳輝震 曾孫, 柳光植 孫”이라 수록되어 있다.
    지(池)를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는 전주와 대전지방 등에 살고 있으나 인구수는 알 수 없다. 한편 대과(大科)의 문과(文科) 급제자 및 1932년 정래화(鄭來和)가 편집한 전주생진청금록(全州生進靑襟錄)에 수록된 소과(小科)의 진사(進士)와 생원(生員) 급제자는 전주인완산군지후(全州人完山君池后)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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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전주류씨 연혁 류기송 전주류씨 13.02.08 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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