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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목 : 성과 씨 그리고 성씨

  • 오래 전의 경험이다. 동네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노인들이 지나는 소년을 불러 세우고 거리 면접을 실시했다. “너의 성씨가 뭐냐?” “안씨 입니다” “얘야, 자기 성을 말함에 ‘안가’라고 해야 하느니라” 성 뒤에 씨를 붙여 묻고는 대답은 낮춰 ‘가’로 해야 한다고 지적하셨다. 왜 그렇지? 성(姓)과 씨(氏)는 어떤 관계이며 성씨의 ‘씨’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의 성씨는 중국 성씨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니 중국의 성씨 역사를 먼저 살펴보자. 姓은 女 + 生의 합자로 ‘여자가 낳았음’의 뜻으로 혈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모계중심사회부터 어머니 중심의 성이 생기게 됐다. 신농의 어머니는 강수에서 살았고 황제의 어머니는 희수에 살았으며 순의 어머니가 요허에서 살아 모친의 성을 따라 姜, 姬, 姚로 됐다.

    삼대(하상주)시대에 들어 성을 가지고 있던 제후국의 임금, 가족, 귀족들은 제후에 봉해져 토지를 하사 받아 씨를 가지게 되는 데 분봉 받은 국읍의 지명이나 관직 등을 씨로 했다. 사마담은 아들에게 태사령이 돼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마천은 38세에 태사령이 돼 역사서 편찬에 매진하다 48세에 ‘이릉 사건’에 연루돼 태사령에서 파면되고 사형이 확정된다. 역사서 완성을 위해 궁형을 자청해 죽음을 면하며 마침내 기원전 91년(한무제 정화 2년)에 오제로부터 당대까지 3천년의 통사를 기전체로 정리해 중국 절대 역사서로서 손색이 없는 사기(史記)를 남겼다.

    사기를 보면 ‘우(禹)는 성이 사씨다. 물길을 막는 아버지의 방식을 버리고 물길을 트는 소통의 방식으로 치수에 성공해 하 왕조의 시조가 된 사람이다. 그 후손들이 여러 곳에 분봉돼 나라 이름을 성으로 삼으니(用國爲姓) 하후씨 등이 생겼다’ 이문열의 초한지에 ‘우 임금의 이름은 문명이요, 성은 사, 씨는 하후이다. 성은 가족 계통에서 보다 위 단위(부족)이고 씨는 성 아래의 작은 단위(씨족)인데, 뒷날에는 합쳐 하나로 된다. 우 임금의 성으로 사는 오제와 같은 혈통 곧 황제의 자손이며, 씨를 달리 했다는 것은 그만큼 번성한 집안에 속했다는 뜻이다’ 강태공 이름은 상이며 성은 강이라 姜商이다. 문왕에 의해 발탁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했으며 제나라의 시조가 됐다. 그의 선조는 우임금으로 부터 여(呂) 땅에 봉해져 여를 씨로 呂商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국시대에 들어 상하귀천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리는 변혁이 빈번이 발생한다. 구세력이 몰락하자 귀족 신분을 나타내던 씨의 존재 가치가 떨어지고 성이 다시 각광을 받으며 성과 씨가 서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진(秦)과 한대에 이르러 성과 씨의 구분이 없어져 같은 의미로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한나라는 한족이란 통합민족 개념의 등장에 따라 성이 대폭 축소되며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도 성을 가지게 됐다. 우리나라의 성은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다. 주몽의 일행이 모둔곡에 이르렀을 때 세 사람을 만난다. 주몽은 “그대들은 어디에 살며 성명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삼베옷 입은 자는 이름이 재사라 하고, 장삼 옷을 입은 자는 무골이며 물 마름으로 지은 옷을 입은 자는 묵거라고 했고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 무골에게 중실, 묵거에게는 소실의 성을 주었다. 또 주몽은 나라 이름을 구려라 했으며 성은 고로 했다.

    우리의 성은 오래 동안 부계혈통을 나타내고 평생 바뀌는 일이 없었다. 씨는 동일 혈통의 사람들이 일파를 표시하는 관향으로 사용된 것으로 사료되고 성씨의 ‘씨’는 성을 높이기 위해 시용되는 접미사이다. 자기의 姓 뒤에 ‘家’를 사용하라는 동네 노인의 지적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다.


    2014년 9월 17일
    경남매일 안명영 진주 반성중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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