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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심씨(豊山沈氏)
유래
  •  시조 : 심만승(沈滿升)
    시조 심만승(沈滿升)은 원래 중국 오흥(吳興) 사람으로 1110년(고려 예종5년)에 동료인 복주 사람 호종단(胡宗旦), 절강사람 유재(劉載)·, 안신지(安愼之) 등과 함께 상선(商船)을 따라 동해안에 도착하여 태백산 아래 풍산현에 정착 하였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청환직에 발탁되고 1114년(예종 9년) 태자첨사부첨사에 오르고 풍산에 대대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풍산을 본관으로 였다.
인물
시조 만승의 8세손 승경(承慶)이 고려 말에 전농시사(典農寺事)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난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고, 그의 아들 귀령(龜齡)이 조선 초기에 크게 현달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에 대장군(大將軍)으로 방원(芳遠)을 도와 박원길과 정도전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던 귀령은 제2차 왕자의 난에도 방원에게 가담하여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사등공신(佐命四等功臣)으로 풍천군(豊川君)에 봉해졌으며, 태종 8년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전라도 연안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여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풍창군(豊昌君)에 봉해졌던 형(亨)과 좌의정에 올랐던 정(貞)의 형제는 풍산부원군 응의 아들로서 소격서령(昭格署令)을 역임한 아우 의(義)와 함께 명성을 떨쳐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이르렀던 연산군 8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정(貞)은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고, 성천 부사(成川府事)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신진사류인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고 남 곤(南 袞)·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주도하여 신진세력들을 몰아내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사손(思遜)의 아들 수경(守慶)은 75세와 81세에 아들을 낳아 연로생자(年老生子)의 기록을 세웠고, 팔도 관찰사를 지낸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특히 그는 유학자이면서도 무예에 뛰어나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데 오발사중(五發四中)을 하여 무공을 떨쳤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나 소실되고 [상제잡의(喪制雜儀)]와 [견한잡록(遣閑雜錄)], [귀전창수(歸田唱酬)]만이 남아 전한다.
그가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을 때 당시 미신으로 귀신을 섬기는 음사(淫祠)가 많이 있었는데 궁중(宮中)과 연관을 맺어 복을 비는 곳으로 되어 있어 관에서도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을, 그가 유생들의 청으로 인하여 사당집을 불사르고 무당을 잡아 가두었다. 이에 문정왕대비(文政王大妃)가 크게 노하여 맨 먼저 주장한 유생을 잡아 가두자 수경은 <모든 것이 내가 한 일이므로 유생은 죄가 없다> 하고 자핵소(自劾疏)를 올리니 왕은 가상히 여겨 벌주지 않았다.
그가 개성을 떠나올 때 백성들이 거리를 메워 수레를 에워싸고 울면서 참아 놓지 못했으며, 비(碑)를 세우고 노래를 지어 사모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노래가 전해내린다고 한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심수경(沈守慶, 1516 丙子生) : 문과(文科) 명종1년(154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심제(沈○) : 문과(文科) 인조24년(1646) 중시 을과(乙科)
 심사손(沈思遜, 1493 癸丑生) : 문과(文科) 중종12년(1517) 별시 병과(丙科)
 심정(沈貞) : 문과(文科) 연산군8년(1502) 별시 이등(二等)
 심제(沈○, 1597 丁酉生) : 문과(文科) 인조11년(1633) 증광시 병과(丙科)
 심일운(沈日運, 1596 丙申生) : 문과(文科) 인조11년(1633) 증광시 병과(丙科)
 심의(沈義, 1475 乙未生) : 문과(文科) 중종2년(1507) 증광시 병과(丙科)
 심사순(沈思順) : 문과(文科) 중종12년(1517) 별시 병과(丙科)
 심일준(沈日遵, 1590 庚寅生) : 문과(文科) 인조19년(1641) 정시 병과(丙科)
 심세림(沈世霖) : 문과(文科) 중종33년(1538) 별시2 을과(乙科)
등 모두 56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5명, 무과 1명, 생원진사시 40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 항렬자
    • 25世
      식(植)
      진(鎭)
      26世
      혁(爀)
      순(淳)
      27世
      기(基)
      만(萬)
      28世
      현(鉉)
      병(昞)
      29世
      수(洙)
      무(茂)
      30世
      동(東)
      31世
      열(烈)
      32世
      철(喆)
      33世
      호(鎬)
      34世
      락(洛)
      35世
      구(求)
      36世
      형(炯)
      37世
      균(均)
      38世
      용(鎔)
      39世
      택(澤)
      40世
      -
      41世
      -
      42世
      -
      43世
      -
      44世
      -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6世孫은 25代孫)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풍산(豊山)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일대의 옛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하지현(下枝縣)이라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영안(永安)으로 개칭되어 예천군의 관할로 하였다. 923년(고려 태조 6)에는 풍산(豊山) 또는 풍악현(豊岳縣)이라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길주(吉州: 安東)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가 뒤에 안동도호부에 합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안동군 풍산현의 4개 동 및 서선면 일부 7개동을 병합하여 풍산면으로 개칭하여 11개 동으로 개편 관할하다가 1973년에 풍산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95년 안동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풍산심씨는
    1985년에는 총 2,772가구 12,024명,
    2000년에는 총 3,397가구 10,99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